
결론부터 말하면, 지난 2주 시장을 짓누른 'AI 신용 불안'은 돈이 없어서 생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칩을 켤 전기가 모자라서 생긴 문제에 더 가까웠습니다. 10월 21일 새벽(한국시간) 스페이스X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일론 머스크가 꺼낸 50여 년 전 영국 코미디 한 편이 그걸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솔직히 저는 발표 직전까지 희망을 거의 접고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SK하이닉스 ADR 시세를 확인하고는 '에이, 내일도 답 없겠구나' 하고 화면을 껐거든요. 그런데 출근길에 실적을 열어보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치즈 가게에 치즈가 없다
숫자부터 보겠습니다. 스페이스X의 3분기 매출은 146억 달러로 1년 전보다 161% 늘었고, 시장 예상을 크게 넘었습니다. 순이익은 44억 달러로, 작년 같은 분기 11억 달러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저를 가장 놀라게 한 건 xAI를 합쳐 만든 '슈퍼 인텔리전스' 부문 매출이 약 76억 달러로 처음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로켓 회사의 최대 사업이 AI가 된 겁니다. 이 돈은 대부분 연산 자원을 빌려주고 받는 돈입니다. 구글은 6월에 월 9억 2천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었고, 앤트로픽도 주요 고객입니다. 제가 직접 숫자를 보면서 느낀 건, 이건 단순한 어닝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이라는 거였습니다.
머스크가 애널리스트 질문에 답하면서 꺼낸 게 1972년 BBC에서 방영된 몬티 파이썬의 '치즈 가게' 꽁트입니다. 손님이 치즈 이름을 수십 개 대도 주인은 매번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가게에 치즈가 하나도 없었다는 반전으로 끝납니다. 스페이스X가 추론 연산 일부를 다른 클라우드로 옮기려 했더니 GB300, GB200, TPU는 물론이고 4년 된 H100까지 남는 물량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겁니다. 이 꽁트 이야기는 이 영상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H100은 엔비디아가 2022년에 내놓은 데이터센터용 GPU로, 지금 기준으로는 구형입니다. 그런데 이 낡은 칩의 임대료가 오히려 올랐습니다. 세미어낼리시스 지수로 H100 1년 계약 단가는 2025년 10월 시간당 1.70달러에서 2026년 3월 2.35달러로 40% 가까이 뛰었습니다. 보통 컴퓨터는 사는 순간부터 중고값이 떨어지는데, GPU 임대 시장은 거꾸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머스크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칩은 그대로인데 그 위에서 돌아가는 모델이 계속 똑똑해진다. 같은 전력 1W로 뽑아내는 연산의 가치가 커지니, 1W의 값도 오른다는 논리입니다. 브렛 존슨 CFO는 지금 가격이라면 새로 까는 연산 장비가 1년 안에 투자금을 회수한다고 했습니다. 머스크는 연산을 배급하듯 나눠주고 있고, 그것도 단기 계약의 시장 가격으로 빌려주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돈은 빌려도 전기는 못 빌린다
2주 동안 공포의 진원지로 지목된 건 코어위브의 신용 불안이었습니다. 무담보 회사채 수익률이 15%를 넘었고, 같은 시기에 오픈AI의 연환산 매출이 알려진 것보다 적다는 FT 보도, 예상을 넘은 미국 9월 CPI, 미국 10년물 금리 상승까지 겹쳤습니다. 제가 직접 그 2주를 버텨보니, 악재 하나하나는 견딜 만했는데 한꺼번에 쏟아지니 공포가 몇 배로 커졌습니다.
그런데 직접 들여다보니 핵심은 신용보다 전력이었습니다. 코어위브는 빚이 500억 달러를 넘고 신용등급도 낮아서 자금 조달 우려가 생긴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전기만 제때 들어와서 GPU가 돌아가면, 그 이자는 매출로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문제는 그 전기가 생각보다 훨씬 구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골드만삭스가 10월 20일 낸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2025년부터 2030년까지 170% 늘고 증가분의 60% 이상이 미국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발전 설비가 전력망 연결을 신청해서 실제로 가동하기까지는 중간값으로 5년이 걸립니다. 연결을 기다리는 발전·저장 설비만 약 2,600GW로, 미국 전력망 전체 용량의 두 배가 넘습니다. 골드만의 디지털 인프라 투자은행 책임자 제이슨 톱스키는 "전력은 아마 영원한 병목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머스크가 8월 말에 한 말과도 맞아떨어집니다. 가스터빈을 주문하면 다른 부품은 다 와도 터빈 블레이드만 1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블레이드는 터빈 안에서 고온·고압 가스를 받아 회전력을 만드는 핵심 부품인데, 정밀 주조 기술이 필요해서 납기가 매우 깁니다. 그래서 스페이스X는 텍사스에 터빈 블레이드 주조 공장을 직접 세우고 있습니다.
돈은 빌릴 수 있습니다. 골드만은 2026~2031년 연산,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에 약 7조 6천억 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봤고, 스페이스X 한 곳만 해도 3분기 설비투자가 196억 달러로 분기 매출보다 많았습니다. 반면 전력망 번호표는 돈으로 당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ESS(에너지저장장치)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데이터센터에 전기를 안정적으로 대려면 저장 설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이 10월 8일 발표한 3분기 잠정 영업이익이 7,560억 원으로 1년 전보다 567% 뛴 것도 ESS 효과가 컸습니다.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공포가 한 번 걷히던 날
코스피는 9월 말 6,838에서 10월 20일 5,552까지, 한 달도 안 돼 19% 가까이 빠졌습니다. 외국인은 10월 2일부터 15일까지 8거래일 연속으로 17조 8천억 원어치를 팔았고, 그중 약 80%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종목이었습니다. 'H100도 동났다'는 신호가 계속 나온다면, HBM 수요가 정점을 찍는 시점이 시장이 걱정하는 것보다 뒤로 밀릴 수 있다고 저는 봤습니다.
실적 발표가 끝난 10월 21일 장에서 코스피는 3.29% 올라 5,735로 마감했고, 오전 10시 51분에는 매수 사이드카까지 발동됐습니다. 2주 내내 팔기만 하던 외국인은 6,646억 원 순매수로 돌아섰습니다. 저도 장중에 그 숫자를 보면서 '공포가 한 번 걷히는 순간이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환율입니다. 외국인이 주식을 팔고 나가면 보통 달러 수요가 늘어 환율이 오릅니다. 그런데 이날 원달러 환율은 1,325.2원으로 2024년 10월 이후 2년 만에 가장 낮았습니다. 10월 1~20일 수출이 1년 전보다 105% 늘었으니, 반도체로 번 달러가 원화로 바뀌는 물량이 외국인 매도를 덮은 걸로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사실도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몬티 파이썬 꽁트 끝에서 손님은 결국 묻습니다. "여기 치즈가 하나라도 있긴 한 거예요?" 지금 시장이 AI에 던지는 질문도 같습니다. 돈이 되는 게 하나라도 있긴 하냐. 스페이스X는 그 질문에 숫자로 답했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지난 2주의 하락은 산업의 방향이 바뀐 게 아니라 공포가 만든 소음이었습니다. 병목이 자본이 아니라 전력이라는 구조가 확인되는 한, 이미 전력을 확보해서 돌리고 있거나 늘려가는 인프라 기업의 가치는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이어지는 빅테크 실적에서 설비투자 계획과 실제 전력 확보 속도가 어떻게 나오는지, 그 숫자들을 직접 챙겨볼 생각입니다. 특정 종목 추천이 아닌 정보 공유 글입니다.
실적 숫자와 머스크·CFO 발언은 스페이스X 3분기 실적 콜 원문, 전력 수요는 골드만삭스 보고서 보도(Axios, 10.20), 코스피·외국인·환율은 연합뉴스·매일일보·SBS Biz(10.15, 10.21) 기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