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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로픽 S-1, 807억 달러 손실의 진짜 정체

binari 2026. 10. 27. 23:37

약 400배. 앤트로픽의 2023년 한 해 매출은 4,100만 달러였는데, 2026년 상반기 여섯 달 매출은 163억 달러입니다. 10월 27일 새벽(한국시간), 미국 반도체주가 장중에 갑자기 튀어 오르는 걸 보고 뭐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앤트로픽이 상장 신고서(S-1)를 공개한 직후였습니다. 저는 사실 기대를 거의 안 했습니다. 손실이 크다는 얘기가 이미 돌았거든요. 그런데 숫자를 뜯어보고 나서 생각이 꽤 바뀌었습니다.



807억 달러 손실은 어디서 났나

S-1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내는 상장 신청서입니다. "우리 회사는 이렇게 생겼습니다"라며 재무 상황을 처음으로 전부 공개하는 문서입니다. 앤트로픽은 10월 26일(미국시간) 이 서류를 내고 나스닥에 'ANT'라는 티커로 상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발표 당일 엔비디아, 브로드컴, 마이크론 같은 반도체주가 같이 올랐습니다.

처음 숫자를 봤을 때 든 생각은 "이거 괜찮은 건가?"였습니다. 상반기 매출이 163억 달러인데 순손실이 807억 달러였으니까요. 치킨집 재료비가 매출의 다섯 배인 것처럼 보여서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손실의 내용을 보면 얘기가 다릅니다. 807억 달러 중 약 724억 달러는 전환사채와 파생상품 부채, SAFE(미래 지분 인수 계약) 같은 금융상품의 공정가치 평가손실입니다. 회사 가치가 급하게 오르면, 나중에 주식으로 바꿔줘야 하는 이런 계약들의 가치도 같이 오르고, 그 증가분이 회사 입장에서는 부채가 늘어난 것으로 잡힙니다. 실제로 돈이 나간 손실이 아니라 장부상의 손실입니다. 손실이 커진 가장 큰 이유가 "몸값이 너무 빨리 올라서"라는 걸 이해하고 나서야, 이 숫자는 반대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업 쪽만 보면 상반기 영업손실은 6억 9,300만 달러로, 1년 전 21억 3,500만 달러에서 68% 줄었습니다. 그리고 2분기에는 9억 7,4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내며 처음으로 분기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컴퓨팅 1달러가 2달러가 됐다

제가 더 인상적으로 본 건 컴퓨팅 비용 1달러당 매출입니다. AI 회사에서 컴퓨팅 비용은 일종의 원재료비입니다. 이 비율이 1보다 작으면 팔수록 손해, 1을 넘으면 드디어 장사가 된다는 뜻입니다.

기간 매출 컴퓨팅 비용 1달러당 매출
2025년 상반기 약 13억 달러 매출의 201% 약 0.5달러
2026년 1분기 약 47억 달러 약 34억 달러 약 1.4달러
2026년 2분기 약 116억 달러 약 56억 달러 약 2.1달러


1년 전만 해도 컴퓨팅에 1달러를 쓰면 매출이 50센트 남짓 나오는 구조였습니다. 그게 올해 1분기 1달러를 넘었고, 2분기엔 2달러를 넘었습니다. "더 팔수록 더 남는" 구조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 컴퓨팅 비용 자체는 상반기 89억 달러로 1년 전보다 283% 늘었는데, 매출이 그보다 훨씬 빨리 늘었다는 뜻입니다.

연도별로 보면 성장 속도가 더 실감 납니다. 2023년 4,100만 달러, 2024년 3억 8,600만 달러, 2025년 45억 8,500만 달러. 매년 열 배 가까이 늘었고, 올해는 상반기만으로 작년 전체의 3.5배를 벌었습니다. 2023년 연매출과 올해 상반기 매출을 비교하면 약 400배입니다. 물론 출발점이 아주 낮았기 때문에 배수가 커 보이는 면이 있고, 앞으로는 성장률이 둔화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원유를 정제해 지능을 파는 회사

이번 S-1을 보면서 가장 강하게 든 생각은 "AI가 실제로 돈을 버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구나"였습니다. "AI로 진짜 돈 버는 회사가 어디 있냐"는 질문에 지난주 스페이스X 실적에 이어 앤트로픽이 숫자로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구조를 단순하게 그리면 이렇습니다. 엔비디아의 GPU와 SK하이닉스의 HBM(AI 연산용 고속 메모리)이 원유라면, 앤트로픽 같은 모델 회사는 그 원유를 정제해 지능을 뽑아내는 정유사입니다. 그리고 그 지능을 가져다 쓰는 기업들이 최종 소비자입니다. 20세기가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를 쓰는 경제였다면, 21세기는 컴퓨팅을 정제해 지능을 쓰는 경제가 되는 겁니다. 이 비유를 처음 들었을 때 이 산업의 가치사슬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으로 감이 잡혔습니다.

물론 위험도 분명합니다. S-1에는 수천억 달러 규모의 컴퓨팅 장기 약정이 들어 있고, 고객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점도 위험 요인으로 적혀 있습니다. 중국발 저가 모델 경쟁, 다음 주 미국 중간선거, 이란 전쟁으로 치솟은 유가 같은 변수도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이 글을 쓰는 10월 27일 밤 11시 이후에도 미국 반도체주는 다시 힘이 빠지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번 S-1이 코스피와 반도체주의 추가 하락 여지를 꽤 좁혀주는 근거가 됐다고 봅니다. 유가가 발작적으로 치솟는 최악의 상황만 아니라면, 이 부근을 바닥권으로 판단할 근거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AI 회사들이 지금의 빅테크 7개 기업(M7) 자리를 얼마나 위협할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적어도 다음 세대 후보 명단을 진지하게 이야기해볼 숫자는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S-1을 보기 전과 후, 제 시장 판단은 꽤 달라졌습니다. 표면의 807억 달러 손실 뒤에 가려진 건 원가 구조의 역전과 첫 분기 흑자였습니다. 다만 이건 상장을 앞둔 회사가 스스로 낸 서류이고, 상장 일정과 공모가가 나오면 시장의 평가는 또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남은 이번 주 빅테크 실적과 FOMC를 보면서 판단을 계속 고쳐 나갈 생각입니다. 특정 종목 추천이 아닌 정보 공유 글입니다.

 

재무 수치는 디지털데일리(10.27), 분기 실적과 시장 반응은 Yahoo Finance(10.26), 위험 요인은 Fortune(10.27) 보도의 S-1 내용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1달러당 매출은 공시된 매출을 컴퓨팅 비용으로 나눈 값입니다. 원유와 정유사 비유는 이 영상에서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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